주일예배

하나님의 일

김병진 목사 / 요 3: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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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2-29 “하나님의 일

 

1.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서 유하시면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22-26

특별히 기억할 것은 예수님이 유대 땅에 가서 세례를 베푸실 때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4:2). 동시에 세례요한은 또 다른 장소인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 중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 예식에 대하여 변론한 후에 일어난 비교와 경쟁과 위기의식이 고조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 한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분노에 차서 따지듯 묻는 것입니다. 누가 정통이 있는 것이냐고 유대인이 와서 마음을 요동하게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경쟁이 일어날 때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비교와 경쟁이 고개를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나의 고유의 사명을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흥함보다 나에게 주신 분량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 자세,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그리고 감사함의 태도입니다(고전4:1-2).

 

2. 양쪽에서 세례 사역하는 것에 대해서 비교하고 갈등하는 제자들이 모습을 보았다면 스승인 세례요한의 다른 해석과 (태도)를 보겠습니다. 27

요한은 사역의 크기나 열매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고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성도입니다. 요한은 신랑 친구로서 신부가 신랑을 잘 만나도록 맺어주는 역할로 인하여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관계에서 중매자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도 정결한 처녀인 성도를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했어요(고후11:2). 이것이 하늘나라를 보는 자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태도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가장 성숙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자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드러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3. 위로부터 오시는 이 만물 위에 계시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 예수님이 친히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31-32

예수님이 친히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만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참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세우는 일인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씀하실 때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5:10).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오심과 십자가를 지심,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고전2:7).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많은 일을 하지 않으셔도 하나님 자체로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해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말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전하려고 왔어요. 양자택일하라는 거에요.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 종 가운데 멸망하던지 둘 중에 하나 하라는 거예요. 오직 한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말입니다. 일시적인 성냄이 아니라 분노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패역한 세대에게 내려지는 일관되는 심판과 벌입니다. 새롭게 부어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오던 그대로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1:24). 예수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합니다. 신앙에 중립이 없습니다. 믿음은 곧 구원이고 거부는 곧 심판입니다.

 

오직 예수를 따라 옳은 길, 의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